무주군의 역사
무주군은 예로부터 서로 다른 부족 국가 또는 다른 행정 구역에 속해 있다가 병합 또는 통폐합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지역을 이룬 고장이다. 즉 삼한 시대는 현재의 무주읍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주계(朱溪)가 마한국(馬韓國)에 속해 있었고 현재의 무풍면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무산(茂山)은 변진국(弁辰國)에 속해 있었는데, 삼국 시대에 와서도 주계는 백제, 무산은 신라에 속하여 각기 다른 국가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된 소위 통일 신라 시대부터 주계와 무산은 비로소 같은 국 가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계는 전주의 진례현(進禮縣, 지금의 금산)에 속해 있었고, 무산은 상주(尙州)의 개령군(開寧郡, 지금의 김천)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에 이르러서 주계(朱溪)와 무산(茂山)은 같은 행정 구역인 강남도(江南道)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두 고을은 서로 다른 소현(小縣)으로 각각 분리되어 조선 초까지 이어 왔다. 조선 초 행정 구역 개편 시 주계와 무풍을 통폐합하여 무주현(茂朱縣)으로 개칭하게 되었고, 후에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하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금산에 속하고 있던 안성과 구천동이 본 군에 편입되면서 무주 도호부(茂朱都護府)로 승격하여 오늘날 무주군의 기틀이 잡혔다.
무주군의 선사시대
무주군에서 아직까지 구석기 시대 유적은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러나 무주읍과 설천면, 부남면 등지에서 구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석기들이 수습되어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신석기 시대 유적이나 유물로 2003년 태풍 루사가 지나간 후 소천리 일대의 원당천 보수 공사 때 빗살무늬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이는 신석기 시대에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인접한 진안 지역의 갈머리 유적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굴된 데에서 그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무주 지역 청동기 유적으로 설천면 소천리 백남규 씨 댁에 있는 지석묘 군과 설천면 청량리 에 위치한 지석묘, 적상면 사천리 지석묘 군이 있다. 이외 청동기 시대 유물로 적상면 길왕리에서 출토된 무문토기편이 있고, 안성면과 적상면, 그리고 부남면에서 마제석검이 수습되었다. 또한 설천면 기곡리 일대에서는 마을 주민에 의해서 마제석부가 수습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무주 지역이 청동기 시대에 활발한 인문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원삼국 시대 무주 지역은 나제통문 동쪽 지역에 위치한 무산(茂山)이 변진국을 맹주로 하는 감문국(甘文國)에 속하였다. 현재의 무주읍에 해당하는 주계(朱溪)는 마한국에 속하였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삼한 때의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 당시 유물과 유구가 확인되지 않아 더 이상 접근하기가 어렵다.
무주군의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신라 조분왕(助賁王) 2년(231),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감문국(甘文國)이 신라에 병합되었 는데, 그 이후 감문국에 속했던 지역을 무산(茂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진흥왕 11년(557)에 청주의 무산현으로 되었고, 문무왕 원년(661)에 무산현이 되었다. 반면 주계는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의 모든 세력을 통일한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에 속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당시 이름은 적천(赤川)이었다. 이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하였다. 삼국 시대 무풍과 주계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였다. 그 당시 국경선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확인되지 않으나 무풍과 주계의 언어와 풍습 차이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현재의 설천면에 있는‘무주목’이라는 고개와 설천면 장덕리 진들 마을 근처로 추정된다. 한편 2007년에 안성면 진도리에서 백제의 석실분으로 추정되는 고분군(古墳群)이 조사되었다. 무주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삼국 시대 유적으로는 안성면에 있는 원통사가 있다. 그리고 무주읍 대차리에 있는 무주 고성지(古城址)는 백제 시대 적천현의 읍성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영토였던 주계가 언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확인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에 멸망되기 전에 신라에 병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실질적인 통치는 신라가 당나라 군사마저 물리친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적천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경덕왕 16년(757)에 적천이 단천(丹川)으 로 이름을 바꾸고, 전주 진례현의 속현이 되었다. 그리고 무산이 속했던 감문군은 개령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동시에 무산현이 무풍현(茂豊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주 개령군에 속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고고학 유물은 무주읍 대차리에서 발굴된 고분군이고, 다른 유적은 백련사지(白蓮寺址)이다. 백련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남북국 시 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지만 사적(史的)인 근거는 없다.
무주군의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초기에는 신라의 지방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였으나 태조 23년(940)에 주·군·현을 정비하면서 단천이 주계로 바뀌었다. 이후 성종 14년(995)에 전국을 10도제로 개편하면서 주계와 무풍을 강남도(江南道) 남원부(南原府) 진례현의 속현으로 편제 되었다. 현종 9년(1018)에는 5도 양계로 나누면서 주계와 무풍을 전라도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주계와 무풍은 여전히 다른 행정 구역이었다. 명종 2년(1172) 감무제(監務制)가 실시되면서 무풍과 주계의 2개 현을 하나로 하여 1인의 감무가 겸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무풍의 감무가 주계까지 관활하였는데, 공양왕 3년(1391)에는 주계가 무풍을 병합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무주군에서는 고려 시대 유적과 유물이 드물다. 다만 1988년 안성면 공진리에서 청자병 1점과 청자 접시 1점이 출토되었다. 건축물로는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月印和尙)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안국사(安國寺)가 있다.
무주군의 조선시대 이후
1398년에 무주향교가 창건되었고, 태종 14년(1414)에 전국이 8도제로 개편됨에 따라 주계와 무풍이 통합되었는데, 무풍의‘ 茂 ’와 주계의‘ 朱 ’를 취해서‘무주’라는 이름을 지었고, 비로소 단일 행정 구역으로 편제되었으며, 현재까지 무주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그 당시 치소(治所)는 주계성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기록된 무주현의 호수는 172호, 인구는 715명이었다. 심산궁곡(深山窮谷)의 무주는 중앙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국방 시설 정비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적산산성(赤裳山城)이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광해군 6년 (1614)에 적상산성 안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설치되어 선조실록이 봉안(奉安)되었다. 인조 12년(1634년)에는 묘향산사고에 있던『조선왕조실록』이 적상산사고로 옮겨져 보관되었으며, 인조 19년(1641)에는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까지 보관 하게 되었다. 그 뒤 현종 15년(1674)에 무주현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때 금산군 에 속하던 안성(安城, 현 안성면), 구천동과 덕지리 지역이던 횡천(橫川, 현 설천면)이 무주에 편입되었다. 고종 32년(1895)에 지방 관제가 개편되면서 무주부가 폐지되고 무주군이 되었다. 이때 전라도 남원부 무주군이 되었는데, 이듬해 전라도가 남북으로 나뉘면서 전라북도 전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은 1914년에 식민지 통치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하려고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는데, 그때 금산군에 속하던 부남면을 무주군에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무주군은 현재의 6개 면이 갖추어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1979년 전국의 군청 소재지가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종전의 무주면이 무주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당시 무주군 의 행정 구역은 1읍 5면, 3출장소, 48리였다. 그러나 1998년 출장소가 폐지되면서 현재 행정 구역은 1읍 5면이 되었다. 1982년 8월에 무주 덕유산에서 세계잼버리대회가 개최되었고, 1997년 1월에는 제18회 무주전주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국립태권도공원을 유치하여 국립태권도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2017년에는 제23회 2017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