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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민속행사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기절놀이

현내리 기절놀이는 북리와 고도 마을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현재는 무풍면 주민 자치센터에서 주관한다. 기절놀이·기 놀이·깃 고사 등은 기본적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놀이적 성격이 함께 한다. 마을 단독으로 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이웃 마을과 함께 진행되는 대동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 가장 일반적인 기 놀이는 술멕이 판에서 존재하는데, 준비 과정과 함께 합굿·기 놀이·마당밟이·정리 등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때 기는 각 마을을 대표할 뿐 아니라 역동적인 판을 벌이는 데 중심이 된다. 예컨대, 다른 마을로 전령을 띄울 때 영기를 앞세웠고, 깃 고사를 지냄으로써 본격적인 술멕이를 시작하였다. 또한 이웃 마을과 합굿을 칠 때도, 그 마을의 기가 나가 다른 마을의 기를 맞이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 간에 자존심을 걸고 기 놀이와 기 싸움 등을 벌였다. 무풍면 소재지에서 열리는 장터를 중심으로 북리 마을은 윗마을, 고도 마을은 아랫마을로 구분된다. 과거에는 북리 마을의 농기가 대장기여서 서로 만나게 되면, 먼저 고도 마을 농기가 북리 마을 농기에 절을 하고, 대장기가 답례를 했다고 한다. 농기의 서열은 농기가 제작된 순서에 따라 정해진다. 현재의 현내리 기절놀이는 당산제·기절놀이·줄다리기·뒤풀이 굿 순으로 행해진다. 당산제는 용기를 세우고 당산 앞에서 하는데,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추어 궂은 일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출하며, 제물은 시루떡·돼지머리·삼색실과·주·포·소지 종이 등이다. 제례는 유교식 절차에 따라 진행되며,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무병은 물론 풍년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리면서 마무리 된다. 이후 기절놀이가 진행된다. 기절놀이는 두 마을에서 각기 농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면서 무풍면사무소 공터에 마주 선다. 마을에서 미리 정해 둔 좌상의 지시에 따라 아랫마을 할머니 당산기가 윗담 할아버지 당산 기를 향해 깃대를 세 번 숙이며 절을 하고 나면, 이때 바로 윗담 할아버지 당산 기는 세 번 반 배로 답을 한다. 기절을 할 때마다 상쇠의 지시에 따라 풍물을 짧게 울려 주는 등 축제 성격으로 화합을 다진다. 기절놀이가 끝나고 나면 풍물을 치면서 신명나게 다시 광장을 한 바퀴 돌아서 줄다리기 를 하는데, 궁극적 목적은 풍요로운 삶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집단적으로 경쟁하는 것이며, 그 경쟁 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화합과 단결이 이루어진다. 줄다리기는 원래 남 녀 두 편으로 나누어 하는데, 여자 편이 이기는 것이 상례이다. 이때 줄을 세 번 당기는데, 이 긴 마을은 그해 재앙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기뻐서 줄을 멘 채 신명나게 놀고, 진 마을은 땅을 치며 통곡한다. 줄다리기가 진행되는 동안 풍물패와 지역민은 자연스럽게 자기편을 응원 한다. 그러나 줄다리기는 승패를 떠나 공동체 구성원의 화합과 단결을 통해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祭儀)이다. 이후 뒤풀이 굿이 진행되는데, 두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기절놀이는 끝을 맺는다.

기절놀이

무주군 부남면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

전염병 예방과 풍년을 기원하며 전승되는 전통 민속놀이의 하나인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방앗거리 놀이’·‘디딜방아 놀이’·‘액막이 놀이’등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러한 액막이 놀이는 지역에 따라 성격과 목적에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 전역에서 행하는 풍속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가뭄을 극복할 때 비가 내리도록 디딜방아를 훔쳐다가 거꾸로 세워 놓고 기우제를 지내는 경우와 마을에 돌림병이 돌 때 병의 전염을 막고자 액막이 목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있다.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 유래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1750년 무렵),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마을에서는 한 해의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이어지면서 현재의 민속놀이가 되었다. 본래 부남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는 민속놀이라기보다는 세시 풍속에 가까운 뱅이로 행하 여졌다고 한다. 즉 호열자(虎列刺, 콜레라)와 같은 돌림병이 마을에 돌면, 이웃 마을에 가서 방아를 몰래 가져와 자기 마을 방앗간 입구에 거꾸로 세워 놓고, 방아공이 있는 쪽에 피 묻은 여자 속곳을 둘러씌워 놓으면, 마을에 들어오려던 재앙이나 질병이 질겁하고 달아난다고 믿 었다는 것이다. 한편, 무주에서는 부남면 가당리와 대유리, 안성면 덕산리 등지에서 질병을 막기 위해서 디딜방아를 훔쳐 오는 풍속이 있었다. 이런 신앙적인 요소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졌는 데,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복원되면서 민속놀이 성격으로 변모하여 전승되고 있다. 대소 마을에서는 과거 부남면 장안리 식암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다 저녁에 제를 모셨다. 훔쳐 온 방아를 방앗거리에서 제를 모시고 난 뒤 마을 입구에 세워 놓았다.

액막이놀이

무주군 안성면 두문마을 낙화놀이

두문마을 낙화놀이의 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경에 중단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문마을 낙화놀이 참여자는 본래 서당에 다니는 상급생으로 청장년이었으나 현재는 마을 주민이 중심이다. 공연 목적은 천기의 음양 기운이 조화롭게 합치되고 천지간의 만물이 잘 생성되기를 기원하는 데 있었다. 또 다른 목적은 서당 학공들의 유흥놀이였다. 두문마을 낙화놀이의 공연 시기는 대체로 삼월 삼짇날, 사월 초파일, 모심기 전, 칠월 칠석이었다. 공연 장소는 마을 남쪽에 마을 서당인 흥감재 앞 시냇물과 그 시냇물 가운데에 있는 논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두문마을 위쪽 작은 방죽에서 한다. 최근에 낙화 권역 사업이 추진되면서 이곳에 현대식으로 낙화놀이 체험관 시설이 만들어졌다.

두문마을 낙화놀이에 사용되는 주재료는 뽕나무 숯⋅ 소금⋅말린 쑥⋅한지⋅무명실 등이다. 두문마을회관 옆 창고에는 숯가마⋅분쇄기⋅음향기기⋅발전기 등이 있으며, 낙화놀이 순서가 사진으로 설명되어 있다. 낙화놀이를 하려면 먼저 낙화봉을 만들어야 하는데, 재료를 잘 준비해야한다. 뽕나무 숯가루와 점화제로 쓰는 쑥짓이 있어야 하며, 기폭제로 소금을 이용한 공정이 매우 중요하다.

낙화놀이는 현재 마을 위쪽 작은 방죽에서 한다. 낙화놀이를 하려면 낙화 줄이 있어야 하므로 방죽 양쪽에 두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도르래를 설치한다. 도르래를 이용하여 낙화 줄 두 개를 방죽에 늘어뜨린 다음에 낙화 줄 위에 미리 준비한 낙화봉을 달아 맨 뒤에 불을 붙여 낙화놀이를 한다. 방죽 양쪽에 도르래를 달아 설치한 두 개의 낙화 줄에 방죽 양쪽에서 낙화봉을 하나씩 매달아 낙화봉 깃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도르래를 이용하여 방죽 가운데 쪽으로 조금씩 낙화 줄을 이동시킨다. 불이 붙은 낙화봉이 방죽 가운데로 이동하면서 꽃 같은 불꽃이 떨어진다. 최근에는 현대식으로 낙화놀이 체험관 시설이 만들어져, 기둥을 세우고나 줄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안성 두문마을에서 행해지는 낙화놀이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음력 4월 8일에 하지만, 음역 3월 3일이나 음력 7월 7일 등 계절적 요인과 생업 주기에 따라 비교적 한가한 날에 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하고 연행한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낙화봉을 제작할 때 촉매제로 소금을 사용하는 방식은 두문마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두문마을 낙화놀이의 불꽃은 매우 화려하다. 낙화놀이의 불꽃은 물과 어울려 만들어 내는 효과도 크다. 불꽃이 흩어져 날림으로서 물속에서도 불꽃놀이가 재현된다. 두문마을 낙화놀이는 서당의 교육과 유희의 연계문화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는 단순히 서당 행사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와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마을 사람들이 다양하게 참여한다. 본래 살고 있는 주민과 귀농인, 노인과 청년을 연결시켜 주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역할까지 한다.

출처:『이영배, 이영균, 무주군청, 두문의 전통과 낙화놀이』.2015

낙화놀이

조선왕조실록 이안행렬 재연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 봉안 재연'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추진한 2019 지방 문화원 원천 콘텐츠 발굴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무주문화원에서 진행하게되었다. 재연 모습은 영상으로 촬영해 원천 콘텐츠로 활용하고 향후 방송 프로그램으로도 편성돼 방영할 예정이다. 2001년 무주군에서 추진했던 '조선왕조실록 봉안식·봉안 행렬 고증 보고서 및 재연시나리오'라는 연구 용역이 진행된 지 18년 만에 재연된 것으로 무주문화원이 주관한 가운데 2019년 11월 2일(토, 15:00~17:30) 무주군청과 전통공예 테마파크 잔디 광장 등지에서 진행했다. 본 행사를 위해 무주군수를 비롯한 무주군의회 의장과 의원, 전북도의원, 전북문화원연합회장, 무주향교 유림, 무주문화원 임원과 사회단체장 등이 주요 출연자로 나섰으며, 적상산 사고로 실록을 봉안하기 위해 도착한 관원들의 '환영식'을 비롯해 '적상산 사고'에 봉안하기 전 무주 관아에 보관했던 '보관식', 그리고 사고로 이동하는 '봉안 행렬'과 사고에 도착해 진행했던 '봉안식', '고유제' 등을 재연했다.

'적상산 사고'는 조선 472년의 역사기록을 296년 동안 온전히 지켜낸 자랑스러운 역사 문화유산이다. 우리 문화원이 주체가 돼 추진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 봉안 재연은 적상산 사고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고 실록을 안전하게 보존해 후대에 널리 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준 기회였다고 자부한다. 앞으로도 재연 행사가 이어져 군민들의 자긍심은 높이고 역사 지킴이였던 무주군의 정체성 또한 재삼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무주의 역사와 함께한 적상산 사고 실록각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선원각은 인근 안국사(安國寺)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호국사는 1949년 여순반란사건 여파로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사고지마저도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설(1988~1995)로 인해 안국사와 함께 상부댐(적상호)으로 수몰됐으며, 수몰되기 전인 1987년 6월부터 9월까지 사고지와 안국사, 호국사지 복원을 위해 수몰되는 문화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있었다. '적상산사고지 유구(遺構)'는 적상호 상부 쪽으로 실록각과 선원각을 복원해 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보호되고 있으며, 안국사는 호국사지로 옮겨 호국사와 함께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록 그 자체가 곧 왕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사고에 봉안할 때 행해지던 모든 의식은 웅장하고 장엄하게 거행됐다. 지방 외사고에 봉안하던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실록청 의궤류, 실록 형지안을 기본자료로 하여 당대 및 후대에 그려진 반차도와 시각 자료를 최대한 활용했다.

자료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원광대학교 마한백제 문화연구소, <茂朱赤裳댐 水沒地區 發掘調査報告書>, 1989
무주향교 명륜당, <적성지 天, 地, 續誌>, 1898, 1957, 1967
무주문화원, <적상산사고 실록 형지안>, 2006 / 무주군지 편찬위원회, <무주군지 上·中·下>, 2004
조선왕조실록 이안행렬